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미국 독립 전쟁 (문단 편집) ==== [[요크타운 전투]]와 전쟁의 종결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Yorktown80.jpg|width=500]] 요크타운의 항복. 1797년 존 트럼블 그림. 체서피크 만의 제해권이 일시적으로 프랑스 함대에게 넘어간 사이, 영국군 사령관 콘월리스가 이끌게 된 요크타운 요새에서 주둔하던 남부 파견 영국군 전체가 그 2배가 넘는 대규모의 미국-프랑스 연합군에 의해 포위되었다. 좀 더 부연하면, 요크타운 포위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건 9월 20일부터고, 9월 첫째주에는 아직 미국-프랑스 연합군은 필라델피아 근처에 머물러 있었고 해상 수송도 시작하기 전이었다. 게다가 8월 30일까지는 미국-프랑스 연합군은 뉴욕과 아주 가까운 스태튼 아일랜드 서쪽에 있었고, 여기까지는 미국-프랑스 연합군이 뉴욕 시를 공격할 때 취해야 하는 공격로와 동일하기 때문에 영국군은 죽었다 깨어나도 미국-프랑스 연합군의 의도를 파악할 수 없었다. 즉, 정확히는 9월 5일 [[체사피크 만 해전]]이 일어났을 때 요크타운의 포위는 일어나지도 않았다. 미국-프랑스 연합군의 대대적인 상륙 이전에 요크타운 요새 주변 지역에는 라파예트 휘하의 병력에 프랑스 함대에서 상륙시킨 해병을 합쳐 고작 3,000명밖에 없었는데 그 병력으로 9,000명에 달하는 영국군을 포위한다는건 어불성설. 또한 영국 함대가 출항할 때는 요크타운이 포위될 거라는 것을 예상하기도 힘들었다. 체서피크 만 해전의 패배는 결과론적으로 요크타운의 포위를 막지 못한 결과를 낳은 것이지, 요크타운의 포위를 보고 영국이 구원함대를 내보냈는데 체서피크 만 해전에서 패배한 게 결코 아니다. 체서피크 만 해전 및 요크타운 요새 포위가 시작되는 것을 보고서야 뒤늦게 프랑스 함대 규모와 대규모 미국-프랑스 연합군의 공격 목표가 요크타운 요새임을 알게 된 영국은 구원을 위해 대대적으로 병력과 함대를 준비했지만, 10월 5일까지 도착하겠다던 구원군이 도착할 기미가 없자 희망을 잃은 콘월리스는 10월 19일에 마침내 [[GG]]를 쳐 버린다. 이 사건 이후 영국에선 전쟁 지지자들이 크게 줄게 되었고 영국 의회에서도 마침내 전쟁 반대파가 우세해졌다. 그동안 영국 의회에서도 전쟁 지지파와 전쟁 반대파 사이에서의 법안, 결의문 등에 있어서 표결 대립이 끝없이 있었는데 지금까지는 전쟁 지지파가 항상 승리했으나 이 전투를 계기로 '미국과의 전쟁을 계속하자고 주장하는 사람은 조지 3세와 영국의 적이다'라는 궁극의 결의문을 통과시키는 상황이 되었다. 국왕에게 막대한 실권과 영향력이 남아있던 전근대적 입헌군주제 시절이기는 했지만 저 결의문 하나로 모든 것이 뒤집혔고, 영국 정부는 즉시 기존의 전쟁 수행 계획을 포기하고 미국과의 평화협상과 철군 준비에 매진할 수 밖에 없었다. 아울러 막후의 강력한 전쟁 지지자였던 조지 3세 역시 더 이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게 되었다. 참고로 앞에서 '여러 사건과 우연이 겹쳐 [[기적]]같은 일이 일어났으니' 라고 표현한 것처럼 다음과 같은 얘깃거리들이 있다. * 원래 남부 파견 영국군은 남부 지역 여러 곳에 분산 배치되어 있었는데, 만약 그 상태에서 미국-프랑스 연합군이 한 곳을 포위 공격했다면 영국군은 고작 2,000-3,000명 수준의 병력만 잃게 되므로 별 타격이 없다. 그런데 식민지 민병대 게릴라의 공세를 견디지 못한 콘월리스가 상관의 허락을 받지 않고 병력을 이동시켰고, 상관인 클린턴은 콘월리스의 독단 행동을 묵인했으며, 그 결과 남부 파견 영국군 전체가 그것도 대규모 상륙 작전이 용이한 해안에 인접한 요크타운 요새 한 곳으로 집중되었다. 또한 9,000명이란 병력의 손실은 영국이 무시하고 전쟁을 계속할 수 있는 수준을 벗어나게 되었다. * 콘월리스가 독단으로 병력을 이동시킨 상황에서 이미 영국의 '남부 전략'은 수정이 불가피했다. 남부 전략은 병력을 분산해서 남부 식민지 지역을 폭넓게 점령하겠다는 것인데, 그와 반대로 병력을 한 곳으로 모으면 요크타운 거점을 제외하고는 남부 식민지 지역은 도로 식민지 민병대의 손에 넘어가게 된다. 그 얘기인 즉, 굳이 콘월리스가 남부 파견 영국군 전체를 데리고 요크타운에 머물러 있을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것이었다. 제해권을 확보할 강력한 영국 함대도 있었으니 마음만 먹었으면 얼마든지 프랑스 함대가 북상하기 전에 콘월리스의 병력을 안전한 뉴욕 시로 철수시킬 수 있었고, 그럴 경우 미국-프랑스 연합군은 닭쫓던 개 신세가 될 수 밖에 없었다. 심지어 체서피크 만 전투와 요크타운 포위 사이에는 20여 일이라는 기간이 존재한다. 그 기간 사이에 심상치 않은 상황임을 인지하고 영국군이 적극적으로 행동에 나섰어도 최악의 참패는 충분히 막을 수 있었다. 그에 비하면 구원군이 도착한 건 콘월리스가 항복한 지 단 5일 후였다. * 조지 워싱턴은 가능성이 희박한 뉴욕 시 공격에 집착했다. 당시 뉴욕 시는 주둔 중인 영국군만 11,000~14,000명이고 수년 이상 요새화된 도시였기 때문에, [[공성전]]을 하려면 미국-프랑스 연합군은 최소 40,000명을 동원해야 했다. 그러나 프-미 연합군이 그 병력을 동원할 수 있었으면 진작에 영국군을 쳐바르고 전쟁 끝냈을 것이다. 물론 뉴욕이 향후 협상 테이블에서 가질 가치는 위에서 서술한 것처럼 상당했지만, 일단 그 시점에서 뉴욕 공격은 미친 짓이었다. [[프랑스 정부]]는 조지 워싱턴 장군에게 미국-프랑스 연합군의 공격 목표를 정할 최종 결정권을 주라고 로상보 장군에게 지시했으나, 로상보는 조지 워싱턴의 뉴욕 시 공격 제안을 끈질기게 반대했다. 마침내 조지 워싱턴은 '프랑스 함대가 지해권을 확보하는게 중요하니까 함대 사령관인 드 그라스 제독이 상황에 따라 어디로 함대를 몰고 오느냐에 따라서 결정하자'고 한발 물러섰는데, [[답답해서 내가 친다|이번에도 로상보는 몰래 드 그라스에게 체서피크 만으로 함대를 이끌고 오라고 전문을 보냈다.]] 로상보 장군의 오지랖이 그렇게 넓지 않았다면 역사는 바뀌었다. * 앞에서 설명했듯이 체서피크 만 해전의 승리는 본진을 비우고 전 함대를 이끌고 나온 드 그라스 제독의 대담함 덕분이지, 북미 전역의 영국 함대가 약했기 때문이 아니다. 실제로 체서피크 만 해전의 영웅인 드 그라스는 얼마 후 영국 함대에 패해 본인까지 포로로 잡히게 되는데, 만약 이런 프랑스 함대의 패전이 단 몇개월 전에만 일어났다면 역시 요크타운 전투는 존재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요크타운 전투 이후로도 당시 시대적 한계와 정치적 문제로 인해 독립전쟁은 2년 더 이어졌으며 요크타운 전투 이후 종전까지의 2년동안 발생한 사상자 수가 전쟁 개시 이후 요크타운 전투 이전까지의 6년 가까운 기간동안의 사상자들의 수보다 더 많았다. 미국이 불리한 가운데 독립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다른 원인에는 '''장교저격'''이 있다. 당시 [[미군]]은 관행을 무시하고, 적극적으로 장교를 저격 사살하거나 포로로 잡으며 영국군의 장교단을 약화시켰다. 현대에도 '민간인은 공격하면 안 된다' 혹은 '전쟁 전 선전포고', '포로에게는 [[제네바 협약]]에 따른 대우' 등과 같은 나름의 법칙이 있는 것처럼 이 당시에 유럽의 국제 전쟁의 규칙 가운데 하나는 전쟁에서 부득이한 상황(눈먼 포탄, 총탄에 맞는 경우 등)이 아니면 '''장교는 대개 귀족이니''' 포로로서 대우하고, 전쟁종료와 함께 협상 후 풀어주는 것이 관례였다. 이는 당시의 시대를 반영한 것인데, [[귀족]]은 사회의 정치적, 경제적 지배층으로서 정치가, 법률가, 군인 이외의 직에 종사하면 사실상 귀족의 신분을 박탈당했다. 또한 영국과 프랑스를 위시한 [[서유럽]] 국가의 장교 계급은 [[연공서열]]을 중시한 계급 매관제였다. 따라서 군인이 곧 정치가이며 정치가가 곧 군인이 될 수 있고, 귀족은 유럽세계에서 그들만의 네트워크 속에서 서로 국가를 떠나 교류하였다. 당대 독일, [[러시아]] 등의 국가도 궁정에서 [[프랑스어]]를 사용, 귀족도 주권국, 슈탄데스헤어, 일반귀족으로 구분하여 유럽 전체에서 통혼하였고, 주권국의 경우 부계로든 모계로든 어느 [[왕실]]과도 8촌 이내로 묶여 있었다. 일반 귀족 또한 [[귀천상혼]]에 의해 각국의 귀족과 교류하고 통혼하였으니... 추가로 19세기 말에는 공식적으로 이러한 사항과 가문 전체가 수록된 책자까지 간행되었다. 여기에 서유럽에 [[산업혁명]]이 전파되고, 유럽의 식민지 정책이 본격화되며 유럽=[[문명화|문명국]]이 사실상 공식화되던 시대였다. 현대적인 관점에서 장교 저격은 부대의 지휘계통을 마비시키는 효과적인 전략이지만[* 2차대전 이후 소위, 중위가 계급별 전사비율로 보면 압도적이며 [[베트남전]]에서 소위의 평균 생존시간은 1시간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실제로도 장교가 저격의 제1순위이다.] 위에서 언급한 당대 유럽의 분위기에서 장교저격은 현대적인 관점에서 보면 현대에 금기시하는 '''민간인 [[학살]]인 [[대도시]] 전략폭격이나 다를 바 없는 파격적인 수'''라고 볼 수 있다. 이 때문에 당시 영국 또한 이를 '''신사답지 못한 행위'''라고 맹렬히 비난했다. 사실 이 외에도 독립군들은 유럽의 귀족 문화를 전혀 모르던 민병대가 주축이다 보니 장교 저격 이외에도 유럽 전장에서는 통용되어 온 '관습'을 전혀 지키지 않았고 이것들이 승리와 연결되는 경우도 많았다. 물론 이 때문에 비신사적 행위라 비난도 많이 받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